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티오키아 공국 (문단 편집) === 몽골 [[일 칸국]]의 영향과 [[아인 잘루트 전투]] === 1254년, 보에몽 5세가 사망하고 공작위를 이은 보에몽 6세는 15살이었다. 그는 공국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숙적 아르메니아의 공주 시빌라와 결혼했다. 마침내 안티오키아 공국은 아르메니아의 완전 속령이 되었다. 아르메니아의 헤툼 1세는 그의 공작위를 인정해주었고, 안티오키아에는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총대주교가 들어섰다. 어느정도 불만이 생겼으나. 힘이 없었던 안티오키아의 노르만 귀족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르메니아의 지배 하에 안티오키아는 안정되는 듯 싶었으나, 헤툼 왕의 치세 말년. 아르메니아 왕국도, 그 어떤 군대도 막지 못하는 폭풍이 레반트 지역에 드리우기 시작했다. [[훌레구]]가 이끄는 [[몽골]]의 거대한 군세가 서진을 시작하여,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소문이 십자군 귀족들에게 퍼지기 시작했다. 1258년에는 십자군을 지중해에 수장시킬 기세였던 [[아이유브 왕조]]의 시리아마저 내분으로 무너져 몽골의 말발굽에 짓밟혔다. 마침내 1260년, 훌라구의 첫 번째 선봉대가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이미 몽골군의 위력을 알고 있었던 레반트의 십자군 국가들은 속속 몽골군에게 항복하고 연공을 바치는 대신 침탈에서 보호받기로 서약했다. 오직 [[예루살렘 왕국]] 본국만이 몽골군과의 친교를 거부하고 오히려 거대한 적 몽골을 상대하기 위해 [[맘루크 왕조]]를 지원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안티오키아의 상황은 훨씬 절망적이었다. 시리아는 이미 몽골 전초부대들이 휩쓸기 시작한 상태였다. 아르메니아와 안티오키아의 귀족들은 가망없는 옛 군주를 따르느니, 이슬람을 무너트릴 괴물과 손을 잡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1260년, 아르메니아 왕의 사절과 안티오키아 공작은 훌레구의 부관 키트부카[* 그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신자였기에 기독교 영주들에게 긍정적이었다.]를 알현하고 [[알레포]]와 [[다마스커스]]의 [[맘루크 왕조]]를 공격하는 것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 해동안 몽골군은 레반트와 이집트 동부를 불태우며 십자군의 염원대로 이슬람을 멸절할 기세였다. 그러나 그들의 서진은 레반트 지역에서 멈췄다. 키트부카는 감히 몽골군의 사신을 참수한 [[맘루크 왕조]]들을 토벌하기 위해 소집령을 내렸다. 최강의 몽골군이었지만, 주력은 [[바그다드]] 지역에서 새 체제를 굳히기 위해 선무중이었고, 전 군을 동원 할 수 없었기에 레반트 지역에서의 병력 차이는 맘루크군이 살짝 우세한 수준이었다. 소수의 안티오키아군도 키트부카의 소집령에 응해 아인 잘루트로 향했다. 그러나 무패의 몽골군은 [[핸드 캐논]]과 [[맘루크]] 중기병을 앞세운 이집트 술탄 쿠투즈와 [[바이바르스]]가 이끄는 맘루크군에게 패배, 지중해 주변에서 퇴각하고 손을 놓고 말았다. 일칸국의 몽골군 주력은 건재했고, 안티오키아 병력도 소수만 투입되었지만, 이 전투의 패배는 결국 안티오키아의 운명을 결정지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